• 감사(Giving Thanks)
  • 조회수: 1064 | 2018.12.14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다."

탈무드

 

 

 

 

 우기가 시작되었다. 내가 사는 북캘리포니아는 대략 6개월은 건기이고 6개월은 우기이다. 우기는 11월 즈음에 시작한다. 올해는 작년보다 비가 많이 내린다. 단비다. 아니 축복이다. 지난주 까지만 해도 2시간 떨어진 파라다이스 시에서 큰불이 나 도시 95%가 불에 탔다. 불을 끄지 못해 애먹었는데 이 비가 소방관 역할을 대신해주었다. 비가 2주만 일찍 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 다리 건너면 아는 사람들이 그곳 소식을 전해 주었다. 불을 미처 피하지 못하여 도로상에서 불길에 휩싸인 사람들과 엄청난 열기에 멀리서도 눈썹이 타들어 가는 것은 오히려 다행이었다는 소식이었다. 사람들이 길 양쪽으로 5층 6층 건물 높이의 불이 났는데 그 사이로 간절히 기도하면서 탈출하는 동영상은 시간이 지난 지금 봐도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든다.

 

 11시 약속에 만나기로 한 환자의 집을 비를 맞으며 뛰어 들어갔다. 집안은 잘 정리되어 있었고 집 중앙의 나무 스토브에서 나오는 온기가 온 집을 따뜻하게 해주고 있었다. 중년의 딸과 함께 무뚝뚝하게 나를 맞아주는 사람은 88세 심부전증 환자. 심부전증 특유의 다리 부종, 그리고 호흡곤란은 새로 받아온 약들 덕분인지 거의 자취를 감췄다. 다만 혈압이 많이 낮았다. 80/50. 

 

 "혈압이 보통 얼마세요? 너무 낮게 나오는데요?“

 "새로운 처방을 받아 온 이후로 좀 낮게 나와요.“

 "흠...어떤 약을 먹고 있는지 한 번 보죠.“

            

 약들을 살펴보았다. Lasix, carvedilol, aldactone, metolazone... 혈압을 낮추는 이뇨제와 혈압강하제가 4개나 되었다. 그래서 혈압이 이렇게 낮게 나왔던 것이다. 담당 의사(PCP, primary care physician)에게 전화를 걸었다. 혈압측정 결과와 환자의 상태를 전달했다. [1] 주치의는 약 하나를 빼보자고 오더를 내렸다. 의사의 지시를 전달했고 환자는 잘 이해했다.

 

 가정방문 간호사의 역할이 제대로 발휘된 방문이었다. 동태를 살펴서 환자가 최대한 병원에 가까이 가지 않게 만드는 것, 그 일이 가정방문 간호사 업무의 핵심이다. 임무를 완수하고 가방에 혈압측정기와 서류들을 넣고 있는데 환자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원래 어디에서 왔습니까?“

 

 이런 질문은 LA시가 있는 남캘리포니아에서는 거의 받지 않는다. 워낙 다양한 인종들이 섞여 사는 곳이니까. 그러나 내가 일하는 직장이 있는 지역은 97%가 백인이다. 내가 아시아인에다 억양도 부자연스러우니 궁금했나 보다.

 

 "북한에서요...“

 "북한요?“

 "농담이에요.^^ 남한에서 12년 전에 이민 왔습니다.“ [2]

 

환자의 얼굴이 펴지며 반가워했다.

 

 "아 그래요? 제가 한국전쟁에 참가했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에 함께했지요...“

            

일 년에 한두 번은 이렇게 한국전에 참가한 퇴역군인들을 만난다. 앞으로 5년 10년 후면 이분들 다 돌아가실 것이고, 그러면 이런 에피소드도 없겠지...

 

"와...정말이요? 맥아더 장군을 아시겠네요.“

 

워낙 어렸을 때 반공교육을 많이 받은 터라 멋진 선글라스에 담뱃대를 물고있는 맥아더 장군의 사진이 머리에 또렷이 남아있다.

 

"그럼요. 인천에 상륙했을 때 그분은 남쪽으로 내려가고 내가 속한 부대는 북쪽으로 진군했지요."

 

나는 그분의 손을 꼭 잡았다.

 

"당신의 희생으로 제가 오늘 여기에 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환자는 나의 갑작스런 감사의 표현에 양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갔다. 그러면서 나에게 감사의 말을 다시 전한다.

 

"하하하...서로 돕고 돕는 거지요. 내가 당신 나라를 지켜주었고 당신은 오늘 나의 건강을 지켜주고...“

            

문득 TV에서 한국 정부에서 미국인 한국전쟁 참여 용사들을 참여하여 대접하는 뉴스 장면이 떠올랐다.

 

"한국 정부에서 한국전쟁 참전 퇴역 군인들을 초청하여 관광도 시켜주고 공연도 보여주고 대접을 잘하던데 그런데 참석을 안 해 보셨나요?“

"그런 게 있었어요?“

"그럼요 거의 매년 있는 거 같던데요. 제가 알아봐 줄까요?“

"그래 주면 고맙지요.“

"알았어요. 제가 정보를 찾아서 우편으로 보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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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10월, 월드컵의 응원 열기가 아직 남아있는 때였다. 그 당시 나는 한국에서 영어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거듭되는 시행착오, 금전적 어려움, 게다가 복잡한 인간관계까지, 모든 것이 나를 막다른 골목에 밀어 넣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울증 전기였던 것 같다. 일이 무섭고 사람이 무서웠다. 깨진 독이 마른 것처럼 마음을 다잡아도 모든 자신감이 바닥이 나버렸다. 나는 아무것도 못 하는 놈이라는 자기비하도 생겼다. 나는 영국이라는 탈출구를 생각해냈고 런던으로 날아 갔다. 그곳에서는 유학생들도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었다. 그래서 허드렛일이라도 하면서 살고 싶었다. 나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곳에서.

 

 그런데 웬일인가...사람이 싫어 도망치듯 갔는데 외로웠다. 학생비자를 유지하기 위하여 등록한 영어학교에 매일 다녔다. 그곳에 몇 명의 한국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지금까지 잊혀 지지 않는 한 분을 만났다. 그분은 체격이 좋았고 얼굴은 동그란 분이셨다. 수업시간에 좀 말이 없었고 말을 할 때면 늦게 배운 영어로 한국식 억양이 많이 배어나왔다. 영어학교를 다니기에는 나이가 좀 있기도 했다. 대부분의 유학생들은 20대, 많아야 30대 초반이었는데 그분은 40대 정도로 보였다.

 

 쉬는 시간에 말을 트기 시작했다. 왜 이곳에 왔으며 한국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지. 유학생들이 친해지면 대개 서로 주고받는 질문들이었다. 그렇게 그분의 배경을 좀 알 수 있게 되었다. 한국 대전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1년 동안 국비로 전 가족이 유학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왔다는 것이다. 초등학생쯤 되는 아이도 둘이 있었던 거 같다. 하루는 자신의 집에 가서 식사를 함께하자고 나와 또 다른 남자 학생을 초대를 하였다.

 

 영국에 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물가가 많이 비싸기 때문에 어떤 사람을 초대한다는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한국의 물가에 곱하기 2 하면 대충 그곳의 물가였다. 큰 부자가 아닌 유학생이라면 아끼며 살아가야 했다.

 

 그날 저녁 정말 오랜만에 배부르게 먹었다. 상추에, 불고기, 오랜만에 보는 김치와 썰어놓은 생마늘과 상추쌈... 한동안 한국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던 나는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그분이 '천천히 많이 드세요.'라는 말을 식사 중에 간간히 했는데 내 귀에 음악과 같았다. 그분의 아내 되시는 분은 밝은 표정으로 식탁의 그릇이 비워지기 전에 부지런히 채워 주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두 내외의 넉넉한 인심과 친절한 표정들을 잊지 못한다. 외로운 사람을 초대해 배불리 먹이고 정을 베푼 그분들. 이름도 알지 못하고 어디에 사시는지 모르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전하고 싶다. 요즘 'TV는 사랑을 싣고 2018' 프로그램을 간간히 보는데 볼 때마다 그분들이 생각이 난다.   

 

 이제는 감사해야 할 사람에게 감사를 표현할 기회를 놓치며 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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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에게 물었다.

 

 "혈압이 낮으면 제일 위험한 게 뭔지 아세요?“

 "글쎄요...뭐죠?“

 "일어설 때 갑자기 어지러워져서 쓰러질 수 있어요. 그러니까 침대에서 일어서실 때 5초 정도 앉아 있다가 천천히 시간을 갖고 일어나세요. 낙상해서 병원에 많이 입원해요. 미국에서 매 20분마다 한 명씩 낙상으로 사망합니다. 정말 조심하셔야 해요. 그러실 수 있죠?“ [3]

 "네. 명심하겠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에서 한국전 참전 용사를 위한 행사를 검색해 보았다. 어렵지 않게 환자에게 전달해줄 좋은 정보를 찾을 수 있었다. 한국 정부가 지원하여 50불만 내면 한국을 둘러볼 수 있는 감사 여행에 관한 정보였다. 그 여행 정보를 출력했다. 그리고 올 해 일찌감치 만들어 놓은 크리스마스 카드를 함께 그 환자에게 우편으로 보내기 위해 봉투에 넣었다.

            

 방문했던 그 환자가 남은 인생 동안 더 건강하고 더 즐겁게 살기를 기원한다.

 

 

 

 


[1] 미국 환자들은 대개 개인 주치의를 갖고 있다. 개인 주치의는 환자에 대한 대략적인 모든 건강정보를 갖는다. 대개 내과 의사나 가정의학과 의사가 담당한다. 예를 들어 환자가 비뇨기계 문제가 생긴다면 주치의에게 먼저 전화하여 상태를 말하고 상의를 해서 경미한 경우는 직접 주치의가 해결하고 사안이 중대하면 주치의가 비뇨기과 전문의에게 Refer해 준다. 주치의들은 보아야 할 환자들이 많기 때문에 여러 명의 의료보조(PA, physician assitant)나 전문간호사(NP, nurse practitioner)를 여러 명 두고 환자들을 돌본다. 그래서 주치의를 직접 만나서 진료를 받는 것이 쉽지 않다.

 

[2] 백인들의 문화에 농담을 빼놓을 수 없다. 상황이 엄중할수록 더 농담으로 마음의 여유를 찾으려고 한다. 예를 들어 심각한 상태의 백인 환자가 응급실에 실려 왔을 때 그 환자가 농담을 던진다고 상황이 덜 심각한 것은 아니다. 환자 CPR 상태에서도 약간의 농담으로 긴장을 풀려는 간호사들의 모습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3] 매 20분마다 미국 노인들은 낙상하여 사망한다. 낙상 방지는 미국 의료계의 주요한 목표 중에 하나이다. 온라인 CDC STEADI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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